은행에서 볼 일을 다 마치고 나왔을 때 하늘에서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은행이라는 사각의 건물에 들어가서 머물렀던 시간은 1시간 정도. 이미 도로는 1시간 전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어버렸다. 단순하게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떨어진 눈이 바닥에 조금씩 쌓이고 있는 모습, 옷깃을 좀 더 단단히 여민 사람들, 그리고 푹 눌러쓴 후드에 눈이 쌓인채로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까지, 그 곳은 내가 은행을 들어가기 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렇구나. 세상은 이렇게 어느 순간 갑자기 변하는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나는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반대편의 빨간색 신호등을 보며, 그리고 건너편 차량 신호등을 보며 내가 기다리는 녹색 신호가 언제 들어올지 가늠하고 있었다. 그 때 내 옆으로 검은색 옷을 입은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오셨다. 검은 색 바지와 검은 색 코트, 검은 색 모자까지 쓰신 할아버지는 안경을 쓰셨다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특징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분이셨다. 그 분은 한 손에는 작은 검정 봉투와 다른 한 손에는 은색 집게를 들고 길거리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주우면서 내 옆으로 다가오셨다. 나는 봉투를 쥔 할아버지의 손에 함께 들려 있는 작은 성경을 보았다. 나는 할아버지가 자원봉사자라고 생각했다. 녹색 신호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별생각없이 버리고 간 횡단보도에 놓인 담배꽁초들. 그리고 눈을 맞으며 그것을 줍는 할아버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따뜻한 곳에서 몸을 녹이며 손에 들고 있는 성경을 조용히 읽으시는 그 모습까지 떠올랐다. 나는 비흡연자이지만 순간적으로 너무 죄송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저런 분이 있어서 도로가 깨끗해지는구나.' 하지만 조금씩 내 옆으로 다가오는 할아버지에게 내가 해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한발 뒤로 물러나는 것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내 앞을 지나쳐 내가 서 있는 곳 뒤쪽으로 이동하면서 계속 청소를 했다.
몇 초 후, 기다리던 신호등에 녹색 불이 들어왔다. 나는 횡단보도를 통해 반대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그 때, 내가 방금 전에 본 할아버지와 비슷한 복장을 한 할아버지 두 분이 내가 있던 쪽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서야 '아! 청소부 할아버지구나.' 그리고는 정말 이상하게도, 정말 미안하게도, 방금 전까지 내가 느꼈던 죄송했던 마음이 눈이 녹듯 사라져버렸다. 정말 한 톨의 죄송함도 남아있지 않고 모두.
왜 그랬을까? 그들이 자원봉사자라고 생각했을 때 느끼던 죄송함이 왜 보수를 받고 일을 하는 노동자라고 생각을 하자마자 없어져버리고 말았을까? 같은 일을 하더라도 보수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그 일과 사람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얼마간의 고민 후, 문제는 마음가짐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원봉사자의 경우 눈이 내리는 날 담배꽁초를 줍는 궂은 일을 하는 이유가 도시의 미화를 위해서라면, 노동자의 경우 눈이 내리는 날 담배꽁초를 줍는 궂은 일을 하는 이유가 돈 때문이라는 것. 전자는 힘들어도 내가 하고 싶기에 하는 것이고 후자는 힘들어도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 그렇다면 그렇게 일한 보수의 양이 차비와 밥값을 제하면 남는게 없을 정도로 낮고 그 분들이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했다면 그것은 또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와 같은 쓸데없는 머리만 아픈 고민들이 이어지고 결국 나는 그 분 모두를 자원봉사자라고 생각해버리자고 내멋대로 결론을 냈다.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이상 내가 그 분들을 한손에는 성경을 들고 다른 한손에 집게를 들고 청소를 하는 자원봉사자라고 생각한다면 그 분들이야 변하는 것이 없겠지만 나로서는 굉장히 큰 변화가 일어난다. 나는 그 분들에게 적어도 죄송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 분들을 위해서 도로에 떨어진 쓰레기를 같이 주워드리지는 못하지만 이렇게라도 생각하면 좀 더 나을 것 같다. 누가? 그 분들이? 아니.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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