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단순히 들어봤다는 것 이상으로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나에게 있어서 이 작품은 너무나 익숙하고 자주 접해왔기에 그 내용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많은 작품들 중에 하나였다. 예를 들자면 셰익스피어의 많은 작품들과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다윈의 진화론과 같은 책들은 실제 그 책을 접하지 않았음에도 그 내용이 워낙 유명한지라 알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오페라의 유령도 그 중 하나였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오페라의 유령을 처음으로 접해본 것은 군복무 시절이다. 요즘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알겠지만 병사들의 독서 생활을 장려한다는 의미에서 국방부에서 내려온 ‘병영문고’들은 솔직히 말해 읽을만한 것들이 별로 없다. 기억나는대로 쓰자면 소설분야, 경제·사회 분야, 자기계발 분야 이렇게 3가지 분야로 각각 10권의 책들이 반년에 한 번씩 나온다. 6개월에 30권이 보급되는 정도면 군생활하면서 읽는 것으로 적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그 책들이 재미가 없다. 너무 재밌어서 병사들이 돌려읽는 판타지·무협 소설들도 생활관에서 1/10도 안 되는 인원들이 읽고 있는데, 그렇게 재미없는 책들을 보급하면서 누가 읽을 것이라고 기대하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책을 그 곳에서 처음 접했는데 물론 너무 재미가 없었다. 몇 장 읽지 못하고 덮어버렸다.
나는 사실 오페라의 유령이 뮤지컬이라는 사실도 관람을 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무식한 나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은 나보다는 똑똑할 것이니 내가 오페라의 유령에 대해서 감히 이러쿵 저러쿵 글을 쓸 자격조차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공연 내용과 관련된 이야기는 뛰어넘고, 본 공연이 모두 끝난 후 25년이나 된 작품을 처음으로 시작했던 영국 오리지널팀의 축하 무대에 대해서 몇 마디 적어보고자 한다.
공연이 끝나면 왠 남자가 파란 옷을 입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오는데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어마어마하다. 미리 이야기했듯이 나는 관련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나중에 집에 와서 찾아보니 당시 부인이었던 사라 브라이트만을 위해 오페라의 유령을 작곡한 앤드류 로이드 웨버라고 한다. 메모리로 유명한 캣츠도 이 사람이 만들었다고 하니 잘은 몰라도 뮤지컬계의 1인자로 손꼽히는 사람이 아닐까싶다. 어찌됐든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나오고 그가 다른 사람들을 줄줄이 소개한다. 대대로 팬텀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5~6명 정도가 소개됐는데 그 중 유독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앤드류가 친절하게 소개를 해주는 장면이 있어서 그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다.
마이클 크로포드. 초대 팬텀 역할을 맡았던 배우라고 한다. 내가 그를 기억하는 건 다른 배우들과 그가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서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과 기쁨들이 가득했다. 단 한 사람, 그의 얼굴에는 기쁨과 웃음보다는 울음에 가까운 표정이 어려있었다. 살짝 그렁그렁한 눈가와 바르르 떨리는 입술, 그럼에도 뭔가 감격해하는 그의 표정을 보며 나는 그냥 말대로 그에게 빠져버렸다. 나는 마이클 크로포드의 그 얼굴에서 본 공연을 볼때보다 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최초로 팬텀 역할을 했던 그는 25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팬텀을 사랑하고 무대를 사랑하고 그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그의 진심이 스크린을 넘어서 나에게 절절히 느껴져왔다. 다른 팬텀들은 다들 돌아가면서 한 구절씩 노래를 불렀지만 마이클 크로포드는 끝내 노래를 하지 않았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진심 하나만으로 그들을 모두 뛰어넘어서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경험이었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화려한 기교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노래를 들을 때도 화려한 곡이나 다른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곡을 부르는 뛰어난 가수들의 곡을 즐겨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조금씩 나이를 먹어갈수록 조금씩 생각이 변해간다. 화려하진 않아도 소박하게 진심이 보여지고 느껴지는 장면에서 감동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노래 한 소절 없이 나를 감동시켜버린 마이클 크로포드의 표정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그런 진심어린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술에 물들다 > 막눈이 영화광'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1124]결혼전야 (0) | 2016.07.28 |
---|---|
[130119]레미제라블 (Les Miserables, 2012) (0) | 2016.07.28 |
[120916]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0) | 2016.07.27 |
[120813]다크나이트 라이즈(The Dark Knight Rises, 2012) (0) | 2016.07.27 |
[120304]퍼펙트게임(Perfect Game, 2011) (0) | 2016.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