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
"Kevin, Kevin, Oh my god Kevin!!" 내게 있어 케빈이라함은 크리스마스에 집에 홀로 남아 좀도둑들을 혼내주는 꼬마 악동이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케빈은 꼬마 악동에서 냉혹한 살인마로 변해버렸으니 내 아름다운 추억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인가ㅠ 영화를 조목조목 분석한 글은 다른 분들의 블로그에 많고, 나는 아무리 애를 써봤자 그분들의 수준에 한참 못미치니 그냥 영화를 본 감상을 짤막하게 적어보고자 한다.
케빈에 대하여, 영어 원제목 'We need to talk about kevin." 나는 외국영화는 일단 번역된 제목보다 원제목에 더 집중을 하는 편인데, 감독의 의도가 제목에 가장 잘 드러나리라는 생각때문이다. 원제목을 우리말로 옮겨보자면 '우리는 케빈에 대해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 정도 되려나? 이 말 그대로 우리는 케빈에 대해서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 케빈이라는 사람, 케빈이 보여주는 이상행동들, 케빈이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한 번 이야기해보고,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자식들을 잘 키우자!로 귀결되면 적당할까?
부모와 자식간의 문제가 발생한다면, 나는 일단 자식의 편에 생각하는 입장이다. (내가 부모가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모든 아이들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 그 아이는 정말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숨쉬는 것과 우는 것밖에 없는 가녀린 존재에 불과하다. 도움 없이는 당장 죽고말 여린 존재를 살려주는 것은 부모이고, 아이는 자신을 살게 해주는 부모에게 인정받고 적응하기 위해서 조금씩 변해간다. 그러므로 어떤 아이가 문제 현상을 보이는 것은 어찌됐든 부모의 잘못이라는 게 내 지론이다.
이런 간단한! 생각에 입각하여 케빈을 바라보자. 무엇이 케빈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에바의 양육태도가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케빈의 엄마, 에바는 (마지막 why?씬을 제외하고) 영화를 통틀어 단 한번도 케빈을 따뜻하게 안아준 적이 없다. 그리고 단 한번도 엄마와 자식 간의 대화라고 할만한 걸 한 적이 없다. 케빈을 바라볼때 에바는 항상 무표정하며, 무서운 짐승을 보는듯한 눈빛을 보인다. 여기에서 이미 이상하게 커버린 케빈이 무서워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케빈이 결국 그렇게 되기까지에 에바의 잘못된 양육태도가 더 우선했다고 본다. 우는 아이가 시끄러워 공사장 옆에서 딴 생각을 하며 현실을 회피한다던가, 산부인과에서 절망적인 표정으로 앉아있는다던가 하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에바가 케빈을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 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케빈이 에바에게 한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내가 기억하는 주목할만한 장면은 첫째, 케빈의 팔에 난 흉터를 보며 에바가 "어떻게 난 흉터인지 기억하니?"라는 질문에 케빈이 대답한다. "당신이 한 일 중에 가장 솔직한 일이었지." 둘째, 미니골프를 치기 위해 티켓을 끊는 에바가 뚱뚱한 사람들이 먹을 것을 입에 달고 산다며 불평을 하자 케빈이 대답한다. "당신도 그렇게 말할때가 있군요."
두 장면을 미루어볼 때, 에바는 케빈에게 엄마로서, 가족으로서 진심이라는 것을 드러내보인 적이 거의 없는 것이 아닐까싶다. 사실 가족이 서로 같이 웃기도 하고, 같이 싸우기도 하면서 감정을 주고받으면서 공감대를 형성해가는 집단인데, 케빈과 에바의 사이에는 이런 일이 거의 없다. 케빈은 못된 행동을 함으로써 에바에게 관심을 끌고 그녀의 감정을 엿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똥을 싸고, 벽에 낙서를 하고, 그녀를 괴롭히면서 말이다.
영화에서 케빈이 에바에게 다정하게 행동한 장면은 단 한컷인데, 잠들기에 앞서 에바가 로빈훗을 읽어주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 순간이 아마 케빈이 원하던 것을 에바가 주는 장면이 아닌가 싶은데, 케빈이 이 장면 이후로 활 쏘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결국 마지막 살인의 모습이 이날 읽었던 동화책에 나오는 장면과 흡사했다는 점에서 곱씹어볼만한 장면이다.
다른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 케빈을 어떤 존재로 바라봤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잔혹한 살인마,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쯤으로 바라봤을까? 하지만 그런 케빈을 만든 건 에바. 영화를 통틀어 에바는 케빈을 딱 한번 안아주는데, 그것이 바로 마지막 장면에서 'Why?'라는 질문을 던진 후이다. 또한 영화를 통틀어 케빈과 대화다운 대화를 한 것도 마지막 'Why?'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밖에 없다. 영화를 통틀어 단절된 사이였던 두 사람, 18번째 생일에야 감정을 공유하고, 대화다운 대화를 한 에바와 케빈.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 뒤였지만 말이다.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과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흉흉한 소식들을 보면 가슴이 무겁다. 케빈과 에바가 보여주는 이 일이 어찌 우리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제는 우리 모두가 정말로 케빈에 대해서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는 시점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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