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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물들다/내맘대로 책 읽기

부패한 언론의 민낯,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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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인리히 뵐, 1판 7쇄 2009년 8월 11일


  하인리히 뵐의 이 소설은 꽤나 유명하다. 책의 말미에 실린 작품 해설에 따르면 "이 작품은 출간되자마자 세간의 주목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교재로도 자주 선정되었고,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들 중 읽어서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작품이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가장 많이 언급되었다."고 한다.


  소설이란 장르에 관심이 있다면 책을 읽지 않았어도 줄거리는 대충 알고 있을 것이다.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고 있는 평범한 가사관리사 '카타리나 블룸'은 카니발을 앞둔 어느날 밤 파티에서 만난 남자 '루트비히 괴텐'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된다. 그 경찰 심문에서 '카타리나'는 '괴텐'이 은행 강도 혐의와 살인 혐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뒤늦게 밝혀지지만 이 혐의조차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를 도망갈 수 있게 도와준 혐의로 그녀는 경찰 측에서 제기한 의문, 즉 공범 또는 오래된 연인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답해야만 했다.


  쫓기는 수배자 '괴텐'과 그에게 연루되었다고 의심 받는 '카타리나'의 이야기. 물론 경찰의 세세한 수사 방식에 잘못이 있음을 따져볼 수는 있겠으나, '카타리나'를 심문하면서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하는 행동 자체에 잘못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경찰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그녀는 의심받을만한 몇 가지 요인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은 그녀에게 합당한 의문들을 제기하고, 그녀는 그 것들에 대해서 솔직하게 소명할 필요가 있다. 작가 하인리히 뵐도 그 사실을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물론 카타리나 블룸이 조사를 받아야 할 입장이라는 것은 그녀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지금 벌어지는 바와 같이 "한 젊은이의 삶을 파괴하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닌지 자문했다고 한다.


인간의 삶을 무차별하게 파괴하는 언론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한다. 바로 그녀가 경찰에서 심문을 받는 동안 발행된 유명 신문 <차이퉁>에 의해서다. <차이퉁>은 범죄자 '괴텐'을 숨겨준 여인 '카타리나'에 대해서 아직 검증되지 않은 사실들을 기사로 작성하고, 주위 사람들의 인터뷰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조작'하여 신문에 싣는다. <차이퉁>은 그녀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으며, (이 당시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갈라져 통일되기 이전이었는지라, 공산주의자에 대한 이유 없는 멸시와 혐오를 엿볼 수 있다.) 어머니는 병원에서 요양을 하고 있고, 오빠는 감옥에 수감해 있다는 사실을 보도한다. 또한 그녀는 남편과 이혼했으며,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냉혹한 인간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당연히 <차이퉁>의 이러한 기사들은 정확한 취재에 의해 작성된 것이 아니다. '카타리나'의 변호를 맡은 '블로르나'의 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카타리나의 아버지가 위장한 공산주의자였다는, 게멜스브로이히의 한 신부가 제공한 놀랄 만한―관계자 모두를 놀라게 한―정보가 사실인지를 조사하기 위해 블로르나는 하루 날을 잡아 그 마을로 갔다. 우선, 이 신부는 자신의 진술을 거듭 확인해 주었고, <차이퉁>이 그의 말을 그대로 올바르게 인용했다고 인정했으며,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제시할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심지어 그럴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했다. 그는 자신의 후각이 항상 믿을 만하다며, 블룸이 공산주의자라는 냄새를 그냥 맡았다고 했다.


  그저, 동네 마을 사람이 자신의 믿을 만한 후각에 의해 공산주의자임을 냄새 맡았기로소니 그것을 기사로 쓰는 부패한 언론의 자태를 볼 수 있다. 결국 '카타리나'는 자신과 진정으로 가까운 몇몇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그대로 명예를 잃어버리고, 오해를 뒤집어쓰게 된다. 그녀의 아파트 우편함에는 그녀를 욕하고 폠훼하는 우편물이 수두룩하게 쌓이게 된다. 그리고 <차이퉁>은 그녀를 돕는 주위의 사람들조차도 비열하게 깍아내리는 기사를 쓴다. <차이퉁>의 기사를 읽고, 화가 난 '블로르나' 박사의 모습은 부패한 언론의 폭력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볼터스하임 부인이 <존탁스차이퉁>의 해당 구절을 전화로 읽어 주었을 때, 그는―사람들이 표현하듯이―자신의 오감을 (이 경우에는 단 하나의 감각 기관, 즉 청각을) 믿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읽어 달라고 했고, 그제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는―사람들이 아마도 이렇게 표현할 것이다.―머리끝까지 화가 나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소리를 지르고 고함을 치며 부엌에서 빈 병 하나를 찾아 차고로 달려갔다. 거기에서 다행히도 그의 부인이 진짜 화염병을 만들려는 그를 말렸다. 그는 화염병을 만들어 <차이퉁>의 편집부에 던지고 나서는 두 번째 화염병을 슈트로입레더의 '첫 번째 집'에 던지려고 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눈앞에 그려 보자. 마흔 두 살의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 그것도 7년 전부터 냉정하고 명확하게 일을 잘 처리하고, 브라질이나 사우디아라비아뿐만 아니라 북아일랜드에서도 국제적인 업무를 훌륭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뤼딩의 주목과 슈트로입레더의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한 마디로 말해, 단순히 한 지역의 명사가 아니라 전적으로 국제적인 인물인, 그런 사람이 화염병을 만들려고 했다니!


  결국 '블로르나' 박사는 화염병을 던지지는 못하지만, '카타리나'는 <차이퉁>지의 비열한 기자 '베르너 퇴트게스'를 총으로 살해하고, 12시 15분에서 저녁 6시까지 후회의 감정을 느껴보기 위해 시내를 이리저리 배회했지만, 조금도 후회되는 바를 찾지 못하고 자수를 하게 된다.


<차이퉁>과 오늘날 우리의 언론의 모습


  소설 속의 <차이퉁>을 보고 우리의 언론의 모습을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다. 하인리히 뵐도 10년 후 작가의 후기를 통해 독일 <빌트>지의 행태를 거의 정부의 기관지나 다름없다며 비판했다. 30~4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봐도 우리나라의 언론 현실하고 별반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자신들의 올곧은 저널리즘보다는 정부나 유력한 권력자의 입장에서 기사를 생산하고 배포하는 일부 신문사들. 그리고 대중이 관심을 가질만한 사건들에 대해서 확인되지 않은 추측성 기사들을 써내는 일부 기자들. 일부 사실의 조작 또는 명백한 오보임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말고로 대처하는 배째라식 언론인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비판 의식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부 국민들까지.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경계하고 조심해야할 모습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부 황색 언론들에 정당한 비판을 가하고, 그들의 가십성 기사, 또는 편향된 기사들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하고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일에는 신경을 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일부 황색 언론에서 여론몰이의 희생자가 나오더라도 그려려니 하고 생각하고 만다. 하지만 언론에 의해 직접 피해자가 된 사람은 주위 사람들이 알 수 없을만큼 커다란 고통을 겪게 된다.

  때때로 우리는 정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써진 객관적인 기사보다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저열한 기사들에 더 관심이 갈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경계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황색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소설 속에서 명예를 잃어버린 카타리나 블룸처럼 다음과 같이 처절하게 외치느 날이 올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움샤우>지에는 열 줄 정도의 기사가 났고 물론 사진도 실리지 않았으며 전혀 결함 없는 사람이 불운하게 사건에 연루되었노라 보도했다고 한다. 그녀가 블룸에게 가져다 준 오려 낸 신문 기사 열다섯 장은 카타리나를 전혀 위로하지 못했고, 그녀는 그저 이렇게 묻기만 했다고 한다. "대체 누가 이걸 읽겠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차이퉁>을 읽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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