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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물들다/내맘대로 책 읽기

문학입문서 추천, 김형수의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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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수업1,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2016년 2월 29일 초판 5쇄.


  이 책은 유시민 작가가 김연수 작가와의 대담에서 "소설 작법서를 추천해달라"는 독자의 요청에 언급한 세 가지 책 중 한 권이다. 또 다른 두 권은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 이태준의 「문장강화」이다. 「소설가의 일」은 예전에 읽어보았으니, 이 다음 읽을 책은 「문장강화」가 될 듯 싶다.


  아무튼 이 책은 김형수 작가가 가지고 있는 문학에 대한 개념과 방법을 정리한 책인데, 그동안 강연을 다니면서 했던 내용을 책으로 묶은 것이라서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말투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분 부분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무난하게 읽히는 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책에서 말하는 문학이란 무엇일까?


인식의 도구들, 진(眞), 선(善), 미(美)


  작가는 이 책의 중반에서 인식의 도구들이라며 진(眞), 선(善), 미(美)를 논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대로 미스코리아를 선발할 때 쓰는 1위, 2위, 3위의 명칭을 이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재미있는 말을 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진(眞)의 반대말은 위(僞)이다. 선(善)의 반대말은 악(惡)이다. 미(美)의 반대말은 추(醜)이다.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즉 인식의 도구로서 작용한다. 진(眞)과 위(僞)는 세상을 참과 거짓으로 나누는 것, 즉 근대에 발생한 과학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善)과 악(惡)은 세상을 착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는 것, 즉 중세시대를 이끌었던 종교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미(美)와 추(醜)는 세상을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으로 나누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문학이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시대에 따라 그 권위가 달랐는데, 중세까지 개인은 '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수레바퀴의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했기에 르네상스가 오기 전까지 인류는 신의 제국에서 살았다. 선(善)과 악(惡)이 최우선시되었다는 말이다. 르네상스 이후에 데카르트,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과 같은 사람들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던 신을 퇴출시키고 세계를 연구하고 분석하려 들면서 과학과 합리주의가 최우선적인 가치로 부각이 된다. 이것은 진(眞)과 위(僞)가 최우선시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신의 자리에 자연의 법칙과 과학을 대치하자 수많은 개인 간의 충돌이 생기고 개인과 사회의 갈등, 개인과 개인의 갈등, 국가와 국가의 갈등이 계속되면서, 21세기는 문화의 세기, 감수성의 가치, 창의성의 가치가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미(美)와 추(醜)가 중요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다. 이러한 견해의 사실 여부를 떠나, 우리가 흔히 아는 진(眞), 선(善), 미(美)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고 체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에 대한 오해, 다작이 최선이다?


  작가는 문학에 대한 오해로 여러 가지를 드는데, 그 중 인상깊은 대목이 다작은 결코 최선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즉, 다시 말해서 시나 소설을 많이 쓰는 것은 좋은 작품을 쓰는데 필요조건은 될 수 있으나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둑을 예로 드는데, 바둑을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한 초보자의 경우에 아주 쉽고 간단한 방법 하나를 알려주고 지키게 하면 실력이 대략 두 계단 정도 올라간다고 한다. 바로 손에 돌을 들고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손에 돌을 들고 무작정 두는 것보다, 가만히 빈손으로 있다가 상대가 돌을 놓거든 전체적인 판을 읽어가면서 자기가 둘 자리를 눈과 머리로 생각한 다음에 돌을 두게 하면 평소의 실력보다 두 급 정도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써내려가는 다작에 대한 분명한 경고의 메시지이다.


  시를 백 편을 쓰면 그 중에 다섯 편쯤은 명시가 나오겠거니, 혹은 소설을 스무 편쯤 쓰면 그 중에 두 편쯤 명작이 나오겠거니, 하고 편수를 늘려가는 것은 날아가는 새들을 향해 돌팔매를 백번쯤 하면 한두 마리쯤 맞아서 떨어지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합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오직 당면해 있는 작품을 잘 쓰는 길만이 그 다음 작품도 잘 쓸 가능성을 여는 것이니 나는 단 한편의 작품도 명작이 아니면 탈고시키지 않겠다, 이렇게요. 다시 김수영의 말을 빌리면, 실패작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태작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함부로 쏜 화살에 어떤 새가 떨어집니까?

33~34쪽


 이러한 견해는 무조건 많이 써보라는 소설 쓰기의 일반론에 살짝 빗겨가는 것이다. 많이 쓰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일반론과는 달리, 한 편을 쓰더라도 온 힘을 다해 써내려가야만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서정과 서사의 차이가 시와 소설로 나뉜다.


  작가는 문학의 큰 두 갈래로 시와 소설을 꼽는다. 그러면서 시는 서정적이며, 소설은 서사적이라고 말한다. 시와 소설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발췌하자면 다음과 같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이 솟구칩니다. 눈이 펑펑 내려서 천지는 하얗고, 마음은 한없이 심란해져서 숱한 그리움이 들끓어 감정이 요동을 칩니다. 객관 세계에 주관적인 감정이 크게 뒤집한 겁니다. 오늘은 직장에서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편지라도 한 통 써야지, 보고 싶은 친구에게 전화라도 해야지, 이렇게 정서불안이 생기는 것, 이걸 서정이라 합니다. 객관 세계에 의하여 환기된 감정! 바로 이런 서정을 위주로 한 시가 서정시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서정을 위주로 하지 않은 시는 아무리 시적 이미지와 운율을 잘 다듬어 놓더라도 좋은 서정시가 되지 못한다는 얘기겠죠?

134쪽


  서사적 방식이란, 단일한 상황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끝없이 변화 발전하는 상황을 연결시켰을 때에만 통하는 전달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서사의 핵심은 우여곡절이에요. 세상사의 곡절들을 잘 읽고 그리는, 또 그것에 실감을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 서사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서사에서는 이야기 얽음새가 중요하겠죠. 구성의 문제가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138쪽


  요약하자면, 객관 세계, 즉 외부 세상에 의하여 자신의 내면이 흔들리면서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시이고, 끝없는 우여곡절을 실감 나게 표현하는 것이 소설이라 한다. 그러면서 서정과 서사에 대한 논의를 좀 더 이어가지만 더 자세한 내용은 책을 통해 직접 접해보기를 권한다.


  문학에 대한 정의나 논쟁이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무쓸모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뛰어난 문학 작품 하나가 이 세상과 세계를 얼마나 바꿔놓을 수 있는지는 이미 지나간 역사 속에서 우리는 수없이 지켜봐왔다. 이렇게 자세하게 문학을 논하고, 치열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늘어나 우리 사회가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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