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대하여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으로 유명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었다. 사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은 2차 세계대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개념일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생각할 능력을 잃은 개인은 큰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사건의 개략적인 개요는 다음과 같다.
1960년 어느 날, 아르헨티나에서 50대 남성이 체포되어 예루살렘 법정으로 이송된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 바로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을 학살하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다고 의심(!?)받는 자이다. 검사는 아이히만의 죄목을 정리하여 기소한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자신은 단 한 사람도 자신의 손으로 죽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은 오직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관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 재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엄청난 복수심이나 거대한 악에 사로잡혀 유대인을 학살한것이 아니고, 그저 자신의 맡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그 일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한 개인'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악의 평범성이 거대한 악을 부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러한 개념 자체는 이해하기에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개념을 안다고 해서 이 책을 다 읽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은 이 책의 마지막 3줄에 가서야 등장한다. 그 이전까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문제'를 '최종 해결책'으로 처리하기 위한 절차와 방법에 대해서 자세하게 논의된다. 책의 저자 한나 아렌트는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사실을 언급하고, 추가로 재판에서 검사가 심문한 내용, 판사가 심문한 내용, 아이히만의 말과 변호사의 말을 모두 종합하여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덧붙인다. 이러한 생각의 흐름을 쫓아가는 일이 철학자의 사고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사실 이 책의 서두에 쉽게 읽히는 책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정도로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일단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솔직히 매끄럽지 못한 번역의 탓이 가장 큰 것 같다. 지시대명사가 앞 문장에서 무엇을 받는지도 명확하지 않고, 다리(leg)와 다리(bridge)처럼 영문으로는 명확한 차이지만 우리말로는 같은 낱말로 쓰이는 단어에 대한 안내도 부족해 의미를 되새겨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무엇보다 한나 아렌트가 대단한 점은, 자신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600만명의 동족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일조(?)를 했던 한 나치 전범을 지극히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아렌트는 이 책의 곳곳에서 '기소된 이러한 항목으로는 아이히만은 죄가 있다고 할 수 없다.'라던지, '아이히만은 전적으로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처럼 말한다. 감정적으로는 때려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나치 전범을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지극히 차분하게 판단하는 대단한 일을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아렌트는 동료 유대인들에게 어마어마한 비난을 받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아렌트의 이러한 태도야말로 사물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고하는 철학자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아이히만에 대하여
아이히만은 그의 주장대로 자신의 손으로 단 한 사람의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치 독일에서 그가 담당한 일은 유럽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운송 수단(주로 열차)를 통해 동부 지역으로 이송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이송만 담당했을 뿐, 아우슈비츠와 같은 수용소에서 일어난 학살과는 무관하다는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아이히만은 성실한 공무원이었음이 틀림 없다. 책에는 그의 걱정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출발과 도착을 종합적으로 운용하는 데의 어려움, 즉 철도 당국과 교통부로부터 충분한 기차를 확보하려는 다툼에 대한 염려, 적시에 유대인을 대기시켜 어떠한 기차도 '낭비되지' 않도록 하는 데 대한 염려, 체포한 자들을 실어 나가기 위해 점령국 또는 합병국 당국으로부터 도움을 얻는 일에 대한 염려, 그리고 각 나라마다 따로 설정되고 항상 변하는 유대인 분류법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내려진 법과 지시를 따르는 일에 대한 끝없는 염려 등
231쪽
77쪽
한나 아렌트는 법정에서 발언하는 아이히만을 보고 그의 인간성을 분석한다. 책에는 더 많은 내용을 언급했지만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았던 것은 다음의 세 가지 특성이었다.
첫째, 이상주의자. 아이히만은 이상주의자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비록 아버지를 살해하더라도) 비록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치 독일에서 아이히만은 공무원으로서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자신의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책에서 언급한대로 때때로 '유대인 전문가'인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명령을 하달받았지만 아이히만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건 단 1차례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이상주의자에 대한 아이히만의 개념이 전적으로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유대인 문제'에 그렇게 매혹된 이유는 그 자신의 '이상주의' 때문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중략) 아이히만에 따르면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한 사람이었고 (따라서 사업가 같은 사람은 아니었음),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아버지마저도 죽음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경찰심문에서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로 강력한 명령을 받고 있었는지만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이상주의자'로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97쪽
둘째, 과시욕과 승진욕이 있는 평범한 인간. 아이히만은 전쟁이 끝나고는 이름을 바꿔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낸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시골의 생활에 아이히만은 곧잘 싫증을 느꼈고, 경찰이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아렌트는 '아마 그러한 따분한 생활을 그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아이히만은 대체적으로 날짜와 연도에 대해 정확하지 않은 기억을 갖고 있는데, 자신의 승진, 또는 유명한 상급자와의 만남과 같은 경우에는 그 연도와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결코 이념적이지 않았고, 그저 전쟁 시기에 나치 정부의 관료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 승진을 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어쨌든 간에 그는 신념을 가지고 당에 가입한 것도 아니었고, 또 어떤 신념에 설득된 적도 없었다. 당에 가입한 이유를 말해달라고 하면 그는 언제나 '베르사유 조약'과 '실업'과 같은 똑같은 진부한 표현들을 반복했다. (중략) 그는 제대로 정보를 입수할 시간도 없었고, 알고 싶은 욕구는 더더욱 없었다. 그는 당의 정강도 몰랐고 「나의 투쟁」도 읽지 않았다. 칼텐브루너가 그에게 "친위대에 가입하는 것이 어때?"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지 뭐"라고 대답했다. 일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그게 전부였다.
87쪽
재판에서는 피고 측 증인 폰 뎀 바흐-첼레브스키가 증언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다른 부대로 전근을 신청하는 방식으로 임무를 회피하는 것은 가능했다. 분명한 것은 개개의 경우 어떤 징계성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생명에 위협을 가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명령에 불복하자니 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받을 것 같고, 복종하자니 판사와 배심원들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질 것 같은" 병사가 처해 있는 고전적인 '어려운 입장'이 아이히만의 상황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157쪽
그는 결코 자신이 해야하는 일(유대인 문제 해결)을 회피함으로써 징계성 처벌을 받는 걸 원치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의 효율을 발휘하여 해결하고자 노력했을 뿐이었다.
셋째, 현실을 보고 생각할 줄 모르는 상투형 인간. 아렌트는 법정에서 아이히만이 말하는 것을 듣고는 상투어를 계속 사용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사용하곤 하는 말을 계속적으로 쓴다는 말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현실을 보고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되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말은 생각이고, 생각은 행동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히만의 경우에 '말' 자체가 상투어를 씀으로써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문제가 생겨버리는 것이다. 아이히만의 이러한 경향은 그가 마지막 교수형을 당하는 장면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마지막 말로 남긴 기괴한 어리석음보다도 이 점을 더 분명히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을 믿는 자라고 분명히 진술하면서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일반적인 나치스 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는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 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300쪽
자신이 마지막으로 죽게 되는 순간조차 현실을 보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고, 장례식에서 쓰곤 하는 문구들을 생각해 읊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모습인가.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 아이히만은 진정으로 자신이 유대인 학살에 책임이 없다고 믿었을 것이며, 진정으로 자신의 승진을 위해 맡은 바 책임을 다했으며, 진정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에 헌신한 평범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평범함 속에,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평범함이 거대한 악의 뿌리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아렌트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러한 평범하지만 거대한 악을 우리는 단순히 아이히만이나 나치 전범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우리 주변을 잠깐만 둘러봐도 이러한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상관의 명령에 따라 탈세와 횡령을 일삼고, 고참의 지시에 따라 후임병들을 괴롭히고, 친구의 명령에 따라 힘이 약한 친구를 못살게 구는 등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평범한 악이 산재해있다.
아렌트는 책 속에서 이러한 악의 평범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진 않고 있다. 하지만 말이 사고이며, 사고가 행동이라는 그녀의 생각을 떠올려봤을 때, 우리가 이러한 악의 평범성을 줄이고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무엇보다 말을 하는 것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로 담아낼 때,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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