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술에 물들다/내맘대로 책 읽기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과연 유토피아인가?

반응형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조지 오웰의 「1984」와 함께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두 작품이 유명한 이유는 물론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문화역사학적 가치를 빼놓을 수 없을테지만, 무엇보다 이 두 작품이 미래 사회의 모습을 정반대의 모습으로 그렸다는 것도 한 몫할 것이다.


  조지 오웰은 「1984」에서 '빅 브라더'에 의해 통제되는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렸다. 주인공을 비롯한 수 많은 사람들은 직장이나 공공장소는 물론이거니와 집 안에서도 '빅 브라더' 스크린의 감시를 받는다. 행동이 조금이라도 수상한 작자는 즉시 경찰에 체포되어 정신 교육을 받게 된다. 주인공은 정보국에서 지난 신문들의 정보를 고치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그 과정에서 '빅 브라더'가 선전하는 자신들의 업적이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믿을만한 '상관'에게 이야기하고, 또 이런저런 과정 끝에 어떤 여인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그 '상관'은 주인공과 같이 의심을 품는 자들을 교정 세뇌하는 사람이었고, 주인공은 모진 고문 끝에 결국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는 '빅 브라더'에 굴복해 버린다. 아니, '빅 브라더'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조지 오웰이 그린 미래 사회는 정보의 통제로 인해 진실을 알 수 없고, 모든 것이 억압되고 억눌러지는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이와는 조금 다른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린다. 헉슬리가 그린 미래 사회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유토피아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간다. 사람들은 자신이 수정될 때(난자와 정자가 만날 때)부터 계급을 부여받고, 그 계급에 맞게 조건 반사화되어진다. 세포 분열을 하는 병 속에 다양한 열처리를 한다던지, 햇빛을 비추고, 알코올을 넣는 등, 사람이 만들어지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키와 몸무게와 같은 외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들을 모두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은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사회에 필요한 덕목들을 갖추기 위해서 조건 반사화되어진다. 아껴쓰는 것보다는 소비를 강조하고,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만인은 만인을 위한다는 명목하게 만들어진 자유로운 연애관, 자연을 싫어하며, 모든 사람들은 항상 행복하며 우울할 땐 소마 한 알을 삼켜 잊는 것 따위가 그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것들로 인해서 멋진 신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다. 그들은 자신의 계급에 맞는 일들을 하며 살아가고, 그런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들은 자유롭게 연애하고 섹스하며, 소마 몇 알이면 아무리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도 씻어버리듯이 잊을 수 있다. 걱정이 알약 하나로 사라지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의심하지 않고 열심히 할 수 있는 상태. 겉모습만 본다면 그야말로 유토피아의 모습이다.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개인 별점 : ★★★★


  하지만 이런 멋진 신세계가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 것이다. 왜냐하면 이 곳에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가 유지되는데 필요한 톱니바퀴의 일환으로서 만들어지고 사용된다. 그렇다면 그 사회는 누가 만들었는가? 그건 세계 총통이라 불리는 몇몇의 사람들에 의해서다. 그들의 의지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회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정자와 난자가 수정될때부터 계획되어 키워지는 그런 세계에서 인간은 과연 행복할 것인가? 


  행복의 의미를 단순히 불행하지 않은 상태라고 정의한다면야 이들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모른다. 그들에게 불행이란 자주 오지 않으며, 혹시라도 몰아치는 불행에 소마 몇 알을 삼키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불행하지 않다는 것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이들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는 감정이 거세된 것이라고 보아야 옳지 않을까. 


  이 글은 야만인으로 통하는 '존'이 등장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울림을 주기 시작한다. 세익스피어 전집을 바이블처럼 들고다니며 그 안에 들어있는 온갖 인간의 감정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존'에게 있어서 신세계의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아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넘어서 그가 부르짖는 것처럼 '더러운 창녀, 혹은 악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신세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죽음 뒤에 자연으로 돌아간 야만인 '존'이 사는 곳에 몰려든 신세계 사람들은 '존'이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낄낄대며 비웃는다. 그의 모습을 헬기를 통해 감상하고 TV 화면으로 중계한다. 이는 불행을 모르는 신세계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될만한 일이 아니었을테지만, 절망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존'에게 있어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존은 자신의 목을 매닮으로써 생을 마감한다.


  다분히 극단적인 면이 있는 소설이지만, 이 소설 속의 유토피아를 가장한 디스토피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조금만 주위를 둘러봐도 자신의 생각보다는 대중 매체, 미디어에 휩쓸려, 그것을 자신의 생각인것처럼 알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을 탓하기보다는 이들을 그렇게 만든 시스템과 그럼으로써 이익을 얻는 집단들을 성토해야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과연 나는 그렇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문제들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헉슬리가 그린 신세계가 결코 멀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며, 내 안의 존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