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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물들다/내맘대로 책 읽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35년,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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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일본의 유명한 세계적 소설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35년간 직업으로서 살아왔던 소설가의 삶에 대해 쓴 짧은 에세이다. 전체적으로 독자들에게 강연하듯 말을 건네는 형식으로 쓰여 있어 읽는데 전혀 부담이 없다. 대략 3시간 정도면 한 권의 책을 독파할 수 있을 정도로 술술 읽히는 이 책은,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비법(?)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35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소설가로서 롱런할 수 있었던 그의 삶과 소설에 대한 철학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루키는 거의 각 장의 말미마다 소설을 짓는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소설가마다 자기만의 방법이 있고, 하루키 자신이 행한 방법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만큼 소설이라는 장르는 정답과는 거리가 먼 장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보다도 아마 소설가로서의 하루키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궁금해할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이유에서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총 12개로 구성된 각 장에서 도움이 될만한 구절을 이 곳에 적어두는 것으로 포스팅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초판 1쇄, 2016년 4월 25일, 무라카미 하루키

★★★


제1회. 소설가는 포용적인 인종인가


  소설 한 편을 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뛰어난 소설 한 편을 써내는 것도 사람에 따라서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간단한 일이라고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못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특별한 자격 같은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아마도 '재능'과는 좀 다른 것이겠지요.

  자, 그런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그걸 분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답은 단 한 가지, 실제로 물에 뛰어들어 과연 떠오르는지 가라앉는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난폭한 말이지만, 인생이란 원래 그런 식으로 생겨먹은 모양이에요. 게다가 애초에 소설 같은 건 쓰지 않아도(혹은 오히려 쓰지 않는 편이) 인생은 얼마든지 총명하게, 유효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쓰고 싶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라는 사람이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또한 지속적으로 소설을 씁니다. 

-29쪽



제2회. 소설가가 된 무렵


  첫 소설을 쓸 때 느꼈던, 문장을 만드는 일의 '기분 좋음' '즐거움'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습니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주방에서 커피를 데워 큼직한 머그잔에 따르고 그 잔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켭니다(이따금 원고지와 오래도록 애용해온 몽블랑 굵은 만년필이 그리워지지만).그리고 '자, 이제부터 뭘 써볼까'하고 생각을 굴립니다. 그때는 정말로 행복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뭔가 써내는 것을 고통이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소설이 안 써져서 고생했다는 경험도(감사하게도) 없습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내 생각에는, 만일 즐겁지 않다면 애초에 소설을 쓰는 의미 따위는 없습니다. 고역으로서 소설을 쓴다는 사고방식에 나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소설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퐁퐁 샘솟듯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7쪽



제3회. 문학상에 대하여


  유명한 신인 문학상을 못 받은게 오히려 좋았다는 하루키.



제4회. 오리지낼러티에 대해서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당신이 문가 자유롭게 ㅍ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얘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힘이 없는 문장은 사람을-혹은 자기 자신까지도-끌어 들일 수 없습니다.

-110쪽



제5회. 자, 뭘 써야 할까?


  이건 뭐 'E.T. 방식'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뒤쪽 창고를 열고 거기에 우선 있는 것을-뭔가 좀 시원찮은 잡동사니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도-아무튼 쓸어 모으고 그 다음에는 분발해서 자잔하고 매직을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 말고는 우리가 다른 혹성과 연락을 주고받기 위한 방도가 없어요. 아무튼 있는 대로 죄다 쓸어 모아 그걸로 노력해볼 만큼 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걸 해낸다면 당신은 큰 가능성을 손에 넣게 됩니다. 바로 당신이 매직을 구사할 수 있다는 멋진 사실입니다.

-131쪽



제6회.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든다-장편소설 쓰기


  초고가 완성되면 잠시 한숨 돌리고(그때그때 다르지만 대개는 일주일쯤 쉽니다) 첫 번째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내 경우, 첫머리부터 아무튼 죄다 북북 고쳐버립니다. 여기서는 상당히 크게, 전체적으로 손을 봅니다. 나는 아무리 긴 소설이라도 복잡한 구성을 가진 소설이라도 처음에 계획을 세우는 일 없이 전개도 결말도 알지 못한 채 되는대로 생각나는 대로 척척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그러는 게 쓰는 동안에 단연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쓰다 보면 결과적으로 모순되는 부분,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등장인물의 설정이나 성격이 중간에 홱 바뀌어버리기도 합니다. 시간 설정이 앞뒤로 오락가락하기도 합니다. 그런 비걱거리는 부분을 하나하나 조정해서 이치에 맞는 정합적인 이야기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상당한 분량을 통째로 빼버리고 어떤 부분은 늘리고 새로운 에피소드를 여기저기에 덧붙이기도 합니다.

(중략)

  그 고쳐 쓰기 작업에 한두 달은 걸립니다. 그것이 끝나면 다시 일주일쯤 쉬었다가 두 번째 고쳐쓰기에 들어갑니다. 이것도 첫머리부터 쭉쭉 고쳐나갑니다. 단지 이번에는 좀 더 세세한 부분을 살펴보면서 꼼곰하게 고칩니다. 이를테면 풍경 묘사를 세밀하게 써넣거나 대화의 말투를 조정하기도 합니다. 스토리 전개에 맞지 않는 점은 없는지 점검하고, 한 번 읽어서 알기 어려운 부분은 쉽게 풀어 써서 이야기의 흐름을 보다 원활하고 자연스럽게 만듭니다. 대수술이 아니라 세세한 수술을 하나하나 더해가는 작업입니다. 그것이 끝나면 다시 한숨 돌리고 그다음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수술이라기보다 수정에 가까운 작업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소설의 전개에서 어떤 부분의 나사를 단단히 조여야 할지, 어떤 부분의 나사를 조금 헐렁하게 풀어둘지를 결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중략)

  그렇게 일단 작품을 진득하게 재운 다음에 다시 세세한 부분의 철저한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진득하게 재운 작품은 나에게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결점도 아주 또렷하게 보입니다. 깊이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이 됩니다. 작품이 '양생'을 한 거소가 마찬가지로 내 머리도 다시 멋지게 '양생'이 된 것입니다.

(중략)

  하지만 그런 '제삼자 도입' 과정에서 내게는 한 가지 개인적인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트집 잡힌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어찌 됐건 고친다'는 것입니다. 비판을 수긍할 수 없더라도 어쨌든 지적받은 부분이 있으면 그곳을 처음부터 다시 고쳐 씁니다. 지적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에는 상대의 조언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고치기도 합니다.

-152~157쪽



제7회. 한없이 개인적이고 피지컬한 업


  책상 앞에 앉아 의식을 집중하는 건 사흘이 한도, 라는 사람은 도저히 소설가는 될 수 없습니다. 사흘이면 단편소설은 쓸 수 있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분명 맞는 말입니다. 사흘이면 단편소설 한편쯤은 쓱싹 써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사흘 걸려 단편소설 한 편을 쓴 다음에 의식을 일단 제로 상태로 털어버리고 새로운 태세를 갖춰 다시 사흘 걸려 단편소설을 한 편 쓴다, 라는 식의 사이클은 길게 반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81쪽



제8회. 학교에 대하여


  학생들의 창의성을 계발하기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창의성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하루키.



제9회. 어떤 인물을 등장시킬까?


  그는 무너가 얘기 끝에 고교 시절의 친한 친구 네 명에게서 거부당했던 체험을 사라에게 말합니다. 사라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즉시 나고야로 돌아가 십팔 년 전에 그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 한다고 쓰쿠루에게 말합니다. "(너는) 네가 보고 싶은 것만 볼 게 아니라 꼭 봐야 할 것을 봐야 해"라고.

  사실 나는 사라가 그런 말을 하기 전까지 다카지 쓰쿠루가 그 네 명의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건 생각도 못했습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인생을 조용히, 미스터리하게 살아가야 했다, 라는 비교적 짤막한 이야기를 쓸 예정이었습니다. 하짐나 사라가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쓰쿠루를 나고야애 보내야 했고 결국에는 핀란드에까지 보내게 되었습니다.

-251쪽



제10회. 누구를 위해 쓰는가?


  총체로서 독자를 상정하고 소설을 쓴다는 하루키.



제11회. 해외에 나간다. 새로운 프런티어


  해외에 자신의 책을 번역시키기 위한 과정을 이야기하는 하루키.  



제12회. 이야기가 있는 곳. 가와이 하야오 선생님의 추억


  가와이 하야오를 몰라서 인상적인 구절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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