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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물들다/내맘대로 책 읽기

존 치버 단편, 「헤엄치는 사람」감상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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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치버의 단편, 「헤엄치는 사람」을 읽었다.


소설을 잘 모르지만, "존 치버"라는 이름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공부를 얼마 하지도 않은 내가 이름을 들어본 것 같은 정도라면 그가 꽤나 유명한 소설가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잘 모른다. 그의 작품도 "헤엄치는 사람"이 처음이다. 그것도 뒤늦게서야 듣게 된 2016년에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진행한 팟캐스트에서 존 치버의 소설을 추천하는 걸 듣고나서 읽게 된 것이다.


소설은 읽는 사람마다 뭔가를 느끼는 지점이 다르고, 그 어떤 느낌이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이제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해석이나 설명이 아니라 간단한 감상평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전에는 소설을 읽을 때, 스토리라인을 중요하게 봤다. 그 기준으로 이 소설을 평가해보자면 거의 낙제점 수준이다. 주인공이 친구의 집에서 자신의 집까지 헤엄을 쳐서 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십여개의 집의 수영장을 건너가며 결국 집에 돌아갔더니 아무도 없었다는 스토리라인이다. 별 거 없다.


그런데 이제는 소설을 읽을 때, 작가가 이 소설을 왜 썼을까? 무슨 말을 하려고 썼을까? 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다면 존 치버는 이 소설을 왜 썼을까?


보편적인 해석은 알코올 중독에 빠진 주인공의 위험함? 무모함? 에 대한 경고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그런 느낌을 별로 받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내가 주인공의 입장에서 생각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주변의 사람들이 주인공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이 소설의 주제라고 지목했지만, 나는 주인공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읽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세상을 살다보면, 다른 사람의 기준과 나의 기준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물론 수많은 다른 사람이 동의하는 일련의 행동양식을 우리는 상식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상식적인 사람, 젠틀맨으로 부른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분명히 젠틀맨이나 상식인에 포함되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엉뚱하지만 자신이 재밌게 떠올린 발상을 가지고 무모하지만 그것을 실천까지 하는 사람이다.  세상은 그런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네가 틀렸다, 너의 처지가 불쌍하다고 말한다. 그는 마지막 자신의 집에 다가올수록 그것을 더욱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되고, 결국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눈물을 흘린다.라고 나는 읽었다.



물론 나는 그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설정을 제대로 캐치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내 해석이 일반적인 해석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소설은 정답이 아니더라도, 내맘대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정말 내 맘대로 읽었다는 사실을 기록해두고 싶어서 글을 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수많은 이웃의 집을 지나면서 서술하는 그들에 대한 설명과 묘사가 참 디테일하다라는 점이었다. 하긴 미국의 문화인지, 아니면 존치버가 살던 시절의 문화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위 사람들, 이웃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중요했던 시절엔 이런 소설이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처럼 옆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가 죽어서 썩어가고 있어도 알 수 없는 아파트 세대가 보기에 이 소설은 그런 점에서 참 대단해보인다. 이웃과 주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존 치버가 이 소설을 오늘 날에 쓴다면 어떤 식으로 쓰게 될까? 그 점이 문득 궁금해진다.


오늘은 여기까지. 생각나는대로 되는대로 썼다. 물론 퇴고도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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