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단편] - 깊은 밤, 기린의 말 / 문학의문학, 2010 가을
아주 오래전에, 그러니까 이 소설이 '문학의문학'에 실렸을 때쯤에 한 번 읽었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는 부모와 쌍둥이, 자폐아로 구성된 가족의 이야기라는 것 이외에 별다른 감상이나 느낌을 받았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그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얼핏 보인다.
소설은 부모와 쌍둥이(나, 진희), 자폐아(태호)로 구성된 가족의 이야기이다. 소설의 화자는 '등장인물-나'로서 쌍둥이 중 첫째언니인 '나'의 시선을 진행된다. 태호가 서너살로 보이는 점, 그리고 쌍둥이의 말과 생각으로 짐작하건대 화자의 연령은 7~9세쯤으로 보인다.
생각해보면 이 소설이 어린 화자를 내세움으로써 얻은 효과가 상당해보인다. 그러니까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쌍둥이를 키운다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니다. 그런데다 자폐를 앓고 있는 막내까지 있는 가정이라면 그 부모가 겪었을 어려움은 보통 이상의 것일테다. 그런데 그 어려움을 어른의 입장에서 서술하지 않고, 어린 화자의 입장에서 서술함으로써 그 어려움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벗어났다. 그러니까 괜한 어려움과 슬픔, 걱정, 힘듦을 주절대는 신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대신 이 어린 화자는 부모의 그 어려움을 '엄마 아빠가 동물원에서 자신들을 버리려고 했다'는 일화로서 간단하게 전달한다. 그것은 어린 화자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기 때문에 진실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실 그 사건의 진실 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김연수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폐아 아이를 둔 부모의 고단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가 소설을 통해 하고픈 말을 찾아내는 건 항상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김연수가 이 소설을 통해서 '소통'에 대해서 말을 하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소통'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화'를 떠올릴 것이다. 네이버 어학사전에 의하면 대화는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 또는 그 이야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보통 소통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서로 말을 주고 받는 것을 떠올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핵심 인물인 '태호'는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자폐를 앓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는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밝히는 엄마의 말에서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이 자리에서 고백하는 말이지만, 우리 아들은 마음이 닫힌 아이입니다. 아무리 큰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말해도 그 말들은 우리 아들에게 가 닿지 않습니다. 제게 말들이란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지 모릅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말들은 외롭고 슬픕니다. 한 때는 너무 힘들어 같이 죽겠다고 자동차를 몰고 어두운 밤거리로 달려나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 마지막으로 우리 아들에게 엄마의 꿈들에 대해서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나는 아들이 좋아하는 치킨집에서 중학교 시절의 제 꿈에 대해서 들려줬습니다. 그때 프라이드치킨을 한 마리 다 먹는 동안, 저는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프라이드치킨이 없었다면 지금 저는 이 자리에 서지도 못했을 겁니다. 제 시가 누군가에게도 그런 따뜻한 프라이드 치킨 같은 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말'이 가닿지 않는 상대와 '소통'이 가능할까? 이 질문에 대한 김연수의 대답은 'YES'이다. 그건 자폐아 태호와 눈먼 강아지 기린의 관계를 통해 유추가 가능하다. 그 둘은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한 문제를 가진 존재들이다. 하지만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태호와 보지 못하는 기린은 분명히 서로를 의식하고 부대끼고 소통한다. 그것은 '말, 언어'로 소통하는 보통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소설은 강아지 기린이 눈먼 강아지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아버지가 기린을 애견센터로 되돌려보낸 후, 그곳을 찾아가는 쌍둥이를 그린다. 쌍둥이는 12시가 다 된 늦은 밤에 길거리로 나서지만 그곳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밝고 휘황찬란한 공간이다. 네온사진이 번쩍이고 수많은 차들이 오가는 그곳은 어둡다고 해서 조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바로 자폐를 앓고 있는 태호는 깊은 우물에 갇혀 있다고 아버지에 의해 표현되지만, 태호의 내면은 어둡다고 조용한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태호의 내면은 그 나름대로 복잡하고 번쩍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터. 어쨌든 쌍둥이는 그곳을 헤매다가 길 건너 저편 불꺼진 애견센터 창문에 있는 기린이를 발견한다. 그리고 두꺼운 유리 때문에 결코 들릴 수 없지만, 기린이가 낑낑대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니까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들은 소통을 하는 것이다. 소통이란 말을 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소통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이냐? 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없다. 김연수가 따로 제시하진 않는다. 내 생각에도 그건 소설가의 영역이 아니다. 그건 심리학자나 뇌과학자의 영역이 아닐까. 요 근래 공부를 하면서 문제에 대한 정답을 제시해야한다고 배우긴 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건 (적어도 내게는) 능력 밖의 일이다. 그 복잡한 것들에 대해 어떻게 일일이 해답을 갖고 있을 것인가. 내게는 이정도면 충분하다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이 아니더라도 '소통'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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