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괴로움을 핑계 삼아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짓 좀 그만둘 수 없어요? 당신 스스로 무기력의 사슬을 끊지 못하면 패배의 구렁텅이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게 돼요. 하긴 새롭게 용기를 내는 것보다 서서히 자신을 파괴해가는 게 훨씬 쉬운 일이긴 하겠죠.
-장 폴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속의 독자>, 볼테르의 <철학사전>
-글쓰기는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요구한다. 하루에 네 페이지씩 글을 쓰려면 나는 하루에 꼬박 열다섯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 창작의 마술이나 나만의 비밀, 창작 비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세상과 접촉을 단절한 채 커피를 충분히 비축해 놓고 클래식 음악이나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헤드폰을 귀에 꽂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방법밖에 없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캐롤을 생각했다. 내가 바라는 건 단 한 가지, 그녀가 당하는 비인간적인 고통이 영원히 끝나는 것이었다. 픽션의 힘은 위대하지만 전능하지는 않다.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그녀를 즐거운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 단 몇 시간이라도 야수가 가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 자체가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픽션의 세계에 사는 것으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마약이나 술에 의지해 잠시 동안 비참한 현실을 잊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어느 순간 무시무시한 현실이 다시 상상의 세계를 압도하며 서슬 퍼런 이빨을 드러낼 것이기에 우리는 지극히 무기력할 뿐이었다.
그 동안의 작품을 봤을 때, 뮈소하면 무엇보다 내면의 아픔을 간직한 캐릭터들과 아름다운 배경, 판타지적인 결말이 떠오른다. 이 작품 또한 마찬가지이다. 각기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세 주인공. 톰, 밀로, 캐롤. 그리고 소설 속의 여자 빌리(릴리). 이들이 그려내는 속도감 있는 전개와 결말을 궁금하게 만드는 줄거리에 정신을 놓고 빨려들어간다.
초저녁부터 정신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도중에 배가 너무 고파서 '오늘따라 왜 이러지?'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오늘따라 그런게 아니라 당연히 일어난 배고픔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몇 백 페이지를 읽어내려가게 하는 뮈소의 흡입력 있는 문장과 줄거리들이 대단하다. 물론 끝부분에서는 조금 실망했다. 뮈소의 작품을 3~4개 읽어봤는데 <그 후에>를 제외하고는 모두 결말이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판타지를 현실과 억지로 결합시키려고 하다보니 드러나는 어색한 설정들이 별로였기 때문인데 그건 종이여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간 읽어왔던 뮈소의 작품들은 "따뜻하다"라는 느낌이 주도적이었는데 <종이여자>는 "화려하다"라는 느낌이 든다. 책을 뒤덮고 있는 다양한 문화들과 풍부한 상식들, 듣도보도 못한 음식들과 (한국을 포함해) 여기저기 등장하는 세계 각국까지. 작가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준비를 했는지를 가늠케 하는 장면들이었다. 좀 아쉬운 건 그것이 과연 필연적인가라는 문제인데,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뮈소가 세계 각국의 팬들을 향한 팬서비스의 일환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잠깐 나왔다 사라지는 이화여대가 소설 속에서 갖는 필연성을 찾기란 힘들다.
쓰고 보니 불평 일색이지만, 이렇게 넋놓고 읽은 소설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작가로서의 그의 재능이 조금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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