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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물들다/내맘대로 책 읽기

[120828]살만 루슈디-한밤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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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누구-무엇인가? 내 대답은: 나는 나보다 앞서 일어났던 모든 일, 내가 겪고 보고 실천한 모든 일, 그리고 내가 당한 모든 일의 총합이다. 나는 이-세상에-존재함으로써 나에게 영향을 주거나 나의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이고 사건이다. 나는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일어난 모든 일이며 내가 죽은 뒤에도 나 때문에 일어날 모든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특별히 나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모든 ‘나’가-즉 지금은-6억-명도-넘는-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모두-그렇게 다수를 포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되풀이한다:나를 이해하려면 세계를 통째로 삼켜야 한다.

 

  아홉 개뿐인 손가락, 뿔관자놀이, 삭발한 수도사 같은 머리, 얼룩덜룩한 얼굴, 붙장다리, 오이를 닮은 코, 거세된 아랫도리, 그리고 나이에 비해 너무 늙어버린 얼굴…… 겸손의 거울 속에서 나는 역사조차도 더는 손댈 곳이 없는 한 인간을 보았다. 미리 예정된 운명에 흠신 두들겨 맞고 초주검이 되어 풀려난 흉측한 괴물의 몰골이었다. 


  자정 혹은 대충 자정 무렵이다. 접은 (망가지지 않은) 검은색 우산을 가진 한 사내가 철로 쪽에서 내 방 창문 쪽으로 걸어오다가 걸음을 멈추더니 곧 쭈그리고 앉아서 대변을 본다. 그러다가 불빛을 등지고 서 있는 내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자신을 훔쳐본다고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반갑다는 듯이 소리친다. "이것 좀 보쇼!" 그러더니 내 평생 처음 보는 기나긴 똥 줄기를 거침없이 뽑아낸다. "40센티미터!" 사내가 외친다. "형씨는 얼마나 길게 만들 수 있소?" 내가 예전처럼 원기왕성했다면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을 것이다. 그 시각, 그가 우산을 지녔다는 사실, 이 두가지만 가지고 그를 내 인생에 끼워넣는 작업을 시작하기에 충분했을 테고, 나의 삶과 어둠의 시대를 이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이 사내가 필요불가결한 존재라는 사실을 거뜬히 입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연결이 끊어지고 접속이 차단된 상태이며 이제 묘비명을 쓰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그래서 배변 챔피언에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이렇게 소리친다. "재수가 좋은 날은 2센티미터쯤 되죠." 그리고 이내 그를 잊어버린다.

 

  수정작업은 부단히 끝없이 계속해야 한다. 내가 지금까지의 성과에 만족한다고 생각지 마라! 불만스러운 점은: 우선 우리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담긴 몇몇 피클병에서는 지나치게 독한 맛이 나고, (특별 조리법 22번) '자밀라 싱어'는 사랑 맛이 다소 불분명해서 통찰력이 부족한 독자들은 내가 근친상간에 가까운 사랑을 정당화하려고 아기 바굼질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빨래통 속에서 생긴 일'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병은 모호하고 개연성이 부족하다. 이 피클은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은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는데, 예를 들자면: 어째서 살림은 이런저런 사건을 겪은 후 비로소 능력을 얻었을까? 다른 아이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았는데…… 그리고 '올 인디아 라디오'를 비롯한 몇몇 장에서는 관현악 같은 맛의 조화 속에 불협화음이 섞였는데: 진자 텔레파시 능력자라면 어째서 메리의 고백을 듣고 충격을 받았을까? 피클로 만들어놓은 역사 속에서 살림은 때때로 아는 것이 너무 적은 듯싶기도 하고 또 때로는 너무 많은 것을 아는 듯 싶기도 한데…… 그렇다, 나는 수정하고 또 수정해야 한다. 고치고 또 고쳐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럴 시간도 없고 그럴 기운도 없다. 그래서 고집스럽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일이 그렇게 일어났으니 그렇게 일어났다고 말했을 뿐이다.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모든 일이 그렇게 일어났으니 그렇게 일어났다고 말할뿐인 이 수다스러운 이야기꾼에게 어찌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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